잭 크레거의 ‘바바리안(Barbarian)’은 공포의 정수를 찌르는 작은 히트작이었다. 더블 예약된 에어비앤비라는 너무나 현실적인 공포에서 출발해, 예측 불가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비틀어 나갔다. 그의 차기작 ‘웨폰(Weapons)’은 한층 더 우월하다. 단순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광기로 치닫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와 조지 A. 로메로의 ‘더 크레이지스’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흔치 않다. 하지만 크레거는 결코 흔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이 야심찬 각본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최근 수많은 ‘고급 공포’들이 그러하듯 모든 점을 억지로 연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웨폰’의 발단을 학교 총기 난사에 대한 은유로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느 날 밤, 17명의 부모가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잠자리에 눕혔다”라는 문장은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는 기사 첫 줄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작품의 비극은 총을 든 고독한 청소년이 저지르는 익숙한 비극이 아니다. 이 경우 17명의 아이들이 새벽 2시 17분에 동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벌린 채 어둠 속으로 달려 나갔다. 마치 ‘비행기 놀이’를 하는 유아들처럼. 이 소름 끼치는 이미지는 한 동네를 산산조각 내며, 울타리 뒤에 숨겨진 분노와 공포를 드러낸다. (코로나19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크레거는 동시대 감독들과 달리 이런 주제를 강조하거나 밑줄 치는 것을 피한다.)
줄리아 가너는 담임교사 저스틴 간디 역을 맡아, 다음 날 교실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반이 텅 빈 것을 목격한다. 단 한 명, 조용한 소년 알렉스(캐리 크리스토퍼)만이 집에 남아 있었다. 왜 그는 가지 않았을까? 무엇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이유를 탐구하기보다 분노를 저스틴에게 돌린다. 그녀를 마녀라 부르며,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크레거는 이야기를 인물 중심의 여러 장으로 나누며, 서사를 직선적으로 끌어가지 않고 앙상블 드라마처럼 구성한다. 저스틴의 트라우마 가득한 삶을 보여준 뒤에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 아처 그래프(조쉬 브롤린)의 이야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저스틴의 시선에서 보았던 사건들이 아처의 이야기와 교차하며 전혀 다른 빛깔을 띠게 된다. 일부는 이런 서사적 장난을 얕은 기교라 말하겠지만, 사실 이는 영화의 주제를 지탱하는 장치다. 공동체가 비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분열될수록, 더 큰 트라우마가 뒤따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사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난 뒤, 영화는 다시 경찰관 폴(올든 에런라이크), 마약중독자 제임스(오스틴 에이브럼스), 교장 마커스(베네딕트 웡)의 시선으로 이동한다. 각 배우들은 자신만의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영화에 활력을 준다. ‘펄프 픽션’식 구조 덕분에 관객은 기존 정보를 재해석하게 되고, 배우들은 전통적 각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받아 존재감을 드러낸다. 가너는 분노를, 브롤린은 절망을, 에런라이크는 무질서를 각자 설득력 있게 구현한다. 특히 에런라이크는 알코올 중독에다 저스틴과 불륜까지 얽혀 있는 인물로, 이미 삶이 피폐해진 상태라 더 이상 기묘한 사건이 필요 없을 정도다.
‘웨폰’의 또 다른 강점은 제작진의 공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촬영한 라킨 사이플의 카메라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서사에 집중한다. 차 문이 쾅 닫히는 순간, 누군가가 달릴 때의 어깨 너머, 바닥에 내던져지는 몸 위에 카메라를 얹으며, 관객을 사건 속으로 끌어들인다. 조 머피 편집자와 함께한 이 비주얼 언어는 영화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놀랍게도 영화는 꽤 웃기다. 크레거는 이런 비극적 여정을 겪는 사람들이 중간중간 “대체 뭐야?”라고 반응할 것임을 인지하며, 캐릭터들을 단순한 메시지 전달자가 아닌 실제 사람처럼 만든다. 그렇다고 공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장은 최근 본 공포영화들보다 훨씬 불편하고 강렬하다. 크레거는 관객을 놀이기구에 태우려 한다. 그렇기에 오르내림이 필요하고, 웃음과 공포를 동시에 제공한다.
2025년 현재 이 나라 표면 아래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읽어내도 좋고, 그냥 손을 들고 롤러코스터를 즐겨도 좋다. 중요한 건 벨트를 매고 탑승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