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거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버리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최신 코미디는 적어도 《버드맨》이나 《바르도》보다 더 진실하게 다가오고, 더 비극적으로 울린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와 톰 크루즈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은 자아와 죽음 사이의 긴장을 동력으로 삼아 영화를 만드는 영화적 무모함의 화신이다. 자신의 내면을 거대한 스펙터클로 외부화하는 정교한 스턴트를 연출하는 데 집착하는 미친 거장으로, 그 과정에서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울 만큼 극단적인 노력을 쏟아붓는다.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그의 가장 거창한 작품들조차 — 아니, 특히 그런 작품들일수록 — 그 뒤에 있는 사람이 현실을 실제보다 더 크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숨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톰 크루즈다.
서로 다른 수단과 서로 다른 목적을 통해, 두 사람 모두 영화 카메라로 자신들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그 한계와 씨름하면서 꾸준히 자신의 창작적 삶, 그리고 실제 삶까지 위험에 빠뜨려왔다. 《버드맨》, 《바르도》, 그리고 《미션 임파서블》 속편들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두 사람 모두 최근 커리어의 상당 부분을 예술과 예술가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데 바쳤다. 이는 어떤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는 — 크루즈가 ‘영화의 구원자’로 떠오른 것을 계산된 이미지 쇄신이라고 보는 것이 어렵지 않기는 하지만 — 현실과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선택한 이야기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거나, 혹은 초월하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냐리투와 크루즈가 마침내 서로의 힘과 페르소나를 합쳐 자기기만에 관한 궁극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디거》에 도착한다. 자신의 존재가 가진 부조리를 조금 놀리는 것 이상의 야심은 전혀 없는, 거칠고 소박한 작은 영화다.
농담이다. LOL. 아니, ROTFL이라고 해도 되겠다.
현실이 허구보다 더 기이해진 시대에 창작의 가치를 탐구하는 느슨한 포스트모던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인 《디거》는 인간적 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초대형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변주작이라서, 이 영화에서 가장 믿을 만한 캐릭터는 매기라는 이름의 외눈박이 애니매트로닉 고양이다. 콘셉트가 너무 높이 떠 있는 비스타비전 풍자극이라 러닝타임을 분 단위가 아니라 고도로 측정하는 편이 더 정확할 정도다.
앞선 《버드맨》과 《바르도》처럼, 이냐리투의 가장 큰 도전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어리석음은 논리를 포기해버린 세계에서 사람들이 삶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방식에 자기반영적으로 기대고 있다. 대성당 수준의 장인정신과 형편없는 《SNL》 콜드 오픈 수준의 뻔함으로 지어진 1억 2,500만 달러 이상의 브레히트식 놀이공원인 《디거》는 표면상의 설정 — 기후변화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조 단위 자산의 석유 재벌이 자신의 이름이 그대로 찍힌 생태학적 재앙을 일으킨다 — 을 이용해 21세기를 규정해온 근시안적 사고를 파고든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근시안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냐리투가 사비나 베르만, 알렉산더 디넬라리스, 니콜라스 자코보네와 함께 쓴 특유의 힘겨운 각본이 1막과 2막의 끝에서 각각 스스로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조차 《바벨》의 감독이라면 결코 할 수 없었을 수준의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디거》가 중심 아이디어에 대한 분명한 메타텍스트적 관심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세상은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이 따라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코미디란 비극에 시간을 더한 것이라고들 한다. 이 영화는 그 공식에서 뽑아낼 수 있는 뜨거운 공기의 마지막 분자까지 프래킹한다. 우리가 과거를 이야기로 만들어 이해하려는 강박을 비웃는 동시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실패를 경악스럽게 바라보는 영화다.
조앤 디디온은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썼다. 이냐리투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반박한다.
《디거》를 통해 그는 마침내 자기기만이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자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영화의 비밀을 밝히지 않고 내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톰 크루즈가 디거라는 사실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정확히는 디거 록웰이다.
레스 그로스먼, 대니얼 플레인뷰, 포그혼 레그혼을 똑같은 비율로 섞은 디거는 기본적으로 위스키에 절어 손가락 총을 쏘아대는 존재가 인간의 몸을 얻은 것과 같다. 크루즈는 카즈 히로가 만든 완벽한 라텍스 특수분장 속에 들어가 있다. 주름진 늘어진 볼살과 꽤 심각하게 튀어나온 배까지 포함된 분장이다. 그리고 그는 이선 헌트를 하나의 살아 있는 스펙터클로 만들어낸 바로 그 육체적인 헌신으로 이 남자를 연기한다.
자신과 대략 비슷한 나이의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노쇠한 장식이 필요한 배우를 본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톰 크루즈라는 사실 자체’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에도 그의 연기는 의도한 대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렬함을 이토록 기묘한 역할에 쏟아붓는 모습을 보는 데서 오는 쾌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럴 만큼 부유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디거는 자신이 설계한 폐쇄된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의 재너두 같은 저택에는 창문 자리에 액자 속 그림이 걸려 있고, 사슴뿔이 달린 거울은 그의 모습을 무한히 반사한다. 세계 정상들조차 디거가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도록 직접 그를 찾아온다.
그의 고양이 매기는 30살 된 카오마니다. 지난 10년 가까이 그의 무릎 위에서 썩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디거는 매기가 언젠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디거는 자신의 직원들이 북극 빙붕에 만들어낸 ‘작은’ 균열이 어떤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땅에서 메탄 화염구가 솟아올라 기지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맨해튼 크기’의 그린란드 얼음덩어리가 유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이 빙산의 크기를 묘사하기 위해 계속 바뀌는 비교 대상은 이 영화에서 몇 안 되는 소화 가능한 농담 중 하나다.
그다음 순간, 직장암에 걸린 미국 대통령이 디거의 워룸에 임시 SCIF를 설치한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존 굿맨의 연기는 《바톤 핑크》에서의 연기를 절제의 모범처럼 보이게 할 정도다. 그리고 피트 헤그세트의 캐리커처 같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작은 군대가 —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마이클 스털버그의 부통령과 함께 — 모여들어 자신들에게 돌아올 피해를 가능한 한 줄이면서 그 덩어리를 핵으로 날려버리는 방법을 논의한다.
그들이 성기로 핵 발사 암호를 입력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T.J. ‘킹’ 콩 소령의 분위기는 강하게 느껴진다. 다만 이 장면들의 정치적 통찰력은 테리 조지보다는 에드 시런에 더 가깝다. 영화는 나중에 다시 돌아와 이 장면들이 원래 웃기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그 장면들이 다른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해낸 것처럼 보였다면 그 주장에도 조금은 힘이 실렸을 것이다.
리즈 아메드는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리는 당황한 과학 고문 역할에 갇혀 있다. 산드라 휠러 역시 가끔 옆에서 비웃는 표정을 짓는다. 《토니 에드만》의 전설적인 배우는 디거의 이복동생이라는 제대로 쓰이지 않은 역할에서도 꽤 잘해낸다. 부분적으로는 영화가 그녀에게 이 모든 것 위에 있는 사람처럼 연기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커리어에서 가장 어려운 역할은 아니다.
마침내 사람들의 인내심을 갉아먹는 30분이 지나고 — 사람들이 디거의 삽에 걸려 넘어지는 단순한 슬랩스틱 정도만이 이 시간을 조금 살려준다 — 이냐리투가 품은 비전의 더 큰 범위가 드러난다.
영화는 1막의 손쉬운 표적들, 이를테면 환경 약탈, 종말론적 쇼비니즘, 신처럼 군림하는 강한 남자들에서 벗어나 앞서 언급한 훨씬 더 추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문제들로 나아간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사’가 개인적으로나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나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되어버린 정도다.

《디거》는 2막에서 새로운 이야기의 가지를 펼쳐낸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야기를 지나치게 짧게 방문한다. 그리고 영화가 제목의 주인공인 석유 재벌의 막다른 이야기로 돌아갈 때마다 나는 그 새로운 이야기를 그리워했다. 디거는 자신이 일으킨 재앙을 완화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남은 러닝타임 대부분을 자신의 ‘캐릭터’가 입은 피해를 수습하는 데 보낸다.
《디거》가 자신의 콘셉트를 성층권 너머까지 더 높이 끌어올릴 때마다 그렇듯, 이 커다란 폭로에도 이상한 자기비하의 냄새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이것은 이런 종류의 마지막 폭로도 아니며, 가장 만족스러운 폭로도 아니다.
이냐리투의 대작은 자신의 범위를 확장할 때마다 영화가 들이는 노력과 실제 영향력 사이의 괴리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데니스 개스너의 놀라운 프로덕션 디자인, 에마누엘 루베스키의 브뤼헐을 연상시키는 촬영, 코스모 셸드레이크의 비뚤어진 음악 — 카우프먼풍 코미디라면 반드시 존 브라이언 음악이 필요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 그리고 나머지 흠잡을 데 없는 기술적 성취들은 모두 영화 속 멸종급 사건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 자체를 의심하는 작품을 위해 봉사한다.
그 기술적 아름다움 덕분에 이런 질문들은 자기만족적이기보다 진심으로 느껴질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라면 나를 말려주시라 — 이냐리투의 과도한 거대함은 그가 그런 질문을 인간적인 규모에서 던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서 아이디어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시 한번 문제는 그의 스펙터클 중심의 시뮬라크르가 우리가 그 아래 묻어두고 싶어 하는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거짓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극도로 관념적인 코미디들은 언제나 뒤섞인 은유라는 물기 가득한 유사(流砂) 위에 세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언제나 그렇듯 《디거》는 모자 위에 모자를 얹고, 그 위에 다시 모자를 얹고, 또 그 위에 모자를 얹는 영화다. 이냐리투는 그것들이 넘어지지 않고 스스로 서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높게 쌓이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모자를 쌓아 올린다.
그 불안은 그의 영화 속 코미디 전체에 만연해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짜증스럽다.
《버드맨》에서처럼 이냐리투는 《뉴요커》 만화의 박자와 신경쇠약의 싱코페이션 — 혹은 적어도 하워드 혹스 영화의 그것 — 을 결합하려 한다. 그 결과 영화 전체가 음정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위대한 카일 쿡의 말을 바꿔 표현하자면, 《디거》는 재미있어야 한다.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다. 힘겹고 서투른 펀치라인과 시각적 개그들은 이 각본의 ‘은하계급 두뇌’를 자처하는 풍자를 IMAX 크기로 확대된 JibJab 만화처럼 보이게 만들 뿐이다.
예상할 수 있듯, 이냐리투는 《디거》의 중반부에서 슬랩스틱을 버리고 히에로니무스 보스풍의 초현실주의로 옮겨갈 때 훨씬 더 잘한다.
모든 사람이 디거의 고양이만큼이나 창백하고 잿빛이며 반쯤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로이 안데르손에게 스테로이드를 투여한 것 같은 미학을 보다 완전하게 받아들인다.
이 장면들 역시 이 기형적인 블록버스터의 나머지 부분만큼이나 인위적이다. 하지만 ‘연기하고 있음’에 대한 강조가 점점 커지면서 이냐리투가 실제로 맞힐 줄 아는 표적을 그려내는 데 도움이 된다.

《디거》의 정점은 연옥 같은 한 장면이다.
크루즈는 저주받은 사람들로 가득한 집회장을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거의 10분 동안 쉬지 않고 독백한다.
그 독백은 우리가 자신과 같은 올리가르히들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에 의존해 ‘우리의 특별할 것 없는 삶의 안락함을 만끽한다’는 모순에 관한 것이다.
이 장면은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가 브로드웨이를 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기회일 뿐 아니라, 크루즈의 영화 경력에 얽힌 메타서사와도 맞닿는다.
플래닛 할리우드의 디거 록웰이라 할 수 있는 크루즈는 ‘클수록 좋다’는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 일부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문화는 단 한 편의 블록버스터가 잘못 계산되는 것만으로 스튜디오 시스템 전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처럼 크루즈는 자신만이 우리를 그 혼란에서 파내어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꽤 설득력 있게 펼쳐왔다.
만약 《디거》가 내가 우려하는 만큼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이냐리투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자기기만의 초상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디거》가 《버드맨》이나 《바르도》보다 더 고귀하고 더 보람 있는 실패작인 이유는 디거 록웰이 실제 인간인 척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만화 캐릭터이며, 그렇기 때문에 앞선 영화들에서 빠져 있던 인간적인 토대가 없어도 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온갖 페이크와 우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이 이냐리투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적 위기를 이전보다 더 직접적이고 공감 가능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한다.
내가 모든 스포일러를 동원해 하나하나 설명해준다고 해도 《디거》가 어디까지 가는지 당신은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둡게 웃기고 —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의도치 않게 웃긴 — 마지막 장면은 현재의 부조리를 견뎌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미래지향적 영화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기기만으로부터 집단적 정신착란에 대한 냉소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비전을 끌어내는 영화다.
